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반 코네프 (문단 편집) === 독소전쟁에서의 활약 ===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코네프는 비텝스크에 배치된 제19군의 사령관이 되어 독일군과 맞서게 된다. 비텝스크에서는 공을 세워 상관들이 패전의 책임을 쓰고 처형되는 와중에 오히려 상장까지 진급했던 코네프였지만, 바쟈마에서는 대패하여 보로실로프의 질책을 받고 [[이오시프 스탈린]]의 눈 밖에 나게 된다. 그러나 코네프는 [[게오르기 주코프]]의 비호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후 칼리닌 전선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코네프는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소련의 반격을 이끌었고, 주코프가 총군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자 주코프의 후임 서부전선군 사령관으로 부임해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벌어질 당시 아군을 구원하러 갈 수 없도록 붙드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상당한 피해를 본 코네프는 북서전선군사령관으로 전임되었고, 작전에 관해 [[스타프카]]와 갈등을 빚어 후방의 스텝 전선군 사령관으로 전임되었다. 그러나 [[쿠르스크 전투]] 당시 루먄체프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하르키우|하르코프]]를 점령해 스탈린의 눈에 들게 된 코네프는 대장으로 진급한 뒤 [[니콜라이 바투틴]]의 보로네시 전선군과 함께 [[우크라이나]] 탈환을 이끌었고,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에서 적을 격멸한 공로를 인정받아 원수로 진급한다. 포위전 당시 코네프의 제2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잔인함과 공격성을 보여주었는데, [[독일군]]이 점령중인 러시아 마을 위에다 인화성 폭탄으로 폭격을 퍼부은 뒤 [[T-34-76|T-34]] [[전차]]와 [[코사크]] [[기병]]을 돌입시켜 항복하는 적군까지 포함해 2만 명을 사살하고 8천 명(사살자 수가 포로보다 한참 높은 것에 주목.)을 포로로 잡았다. 코네프는 후에 코사크 기병의 용맹성을 칭찬하면서 "걔네들은 독일군이 항복한다고 든 손까지 잘라버리더군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코네프의 개인적인 성품은 온화한 편이었고, [[책벌레]]로 유명해 전선에서도 소설이나 역사서를 가져가 짬날 때마다 읽곤 했다. 이후에도 독일 남부집단군을 무너뜨리며 [[루마니아]]까지 진출한 코네프는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 이후 바투틴을 대리하던 주코프의 후임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으로 전임된다.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당시 슐레지엔 지방으로 진격한 코네프는 독일 A 집단군을 상대로 잠시 밀려났지만, 곧장 재반격을 개시해 A 집단군을 밀어내고, [[베를린]]으로 향하는 진격로의 안전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주코프의 제1벨라루스 전선군이 젤로 고지에서 발이 묶이자, 스탈린은 주코프의 제1벨라루스 전선군과 코네프의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 사이의 전투 지경선을 없애버리면서 경쟁을 부추겼고, 코네프는 베를린을 점령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젤로 고지를 겨우 넘은 주코프가 코네프에게 질 수 없다면서 광속으로 진격하는 바람에 베를린 점령의 영광은 주코프에게 돌아갔고, 코네프는 이에 무척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 대신 코네프의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은 베를린 남방을 돌아 서쪽으로 진격해, [[엘베 강]]에서 [[오마르 브래들리]]가 이끄는 [[미군]]과 조우했다. 직후 스탈린의 지시로 방향을 남쪽으로 틀어 [[체코슬로바키아]]로 진격했고, 프라하 공세로 [[프라하]]를 해방시켰다. 코네프는 이 공로로 종전 후에 체코슬로바키아군 원수 직함을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